• 한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와 가족들
  • 김기영 | 911호 | 2017.05.24 14:32 | 조회 1330 | 공감 0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유일한 박사(1895-1971)

     

    우리나라에 경영자는 많다. 돈을 많이 버는 경영자는 쉽게 생각난다. 존경할 만한 경영자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었고,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경영자가 있다. 바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성공한 창업가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유일한 박사. 그의 아버지는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 박사가 9살 때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미국에서 자란 유 박사는 제너럴 일렉트릭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3년 만에 회사를 나왔다.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세웠다.

    당시 중국 음식에 필수 재료였던 숙주나물은 유통이 발달하지 않아 금방 썩어 말라버리곤 했다. 유 박사는 연구 끝에 오래 보관 할 수 있는 통조림을 개발했다. 그의 숙주나물 통조림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남다른 경영 방식

    많은 부를 손에 쥔 1924. 유 박사 나이 29세 때였다. 일 때문에 한국을 밟았다. 당시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그는 고국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년 뒤, 그는 유한양행을 세웠다.

    유한양행은 처음에는 국내에 필요한 약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팔았지만, 1933년에는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개발해 판매하게 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의 남다른 경영 사고는 당시 신문광고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의 경쟁사들은 자신의 약을 만병통치약인 듯 선전하며 소비자들을 현혹했다. 반면 유한양행은 제품 용도는 물론 약을 개발하고 만든 사람들을 밝혀 신뢰도를 높였다.

     

    청렴결백한 유일한

    유일한 박사의 남다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36년 유한양행은 1주당 50원씩 주식 1만 주를 발행했다. 자본금 50만 원을 주식회사가 됐다. 당시 유 박사를 포함한 직원 77명 가운데 24명이 주주로 등재됐다.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한 것으로 직원들과 기업의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실천적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줬다.

    유 박사는 정경유착이 일상화였던 60~70년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에게 기대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정치가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여러 차례 당시 정부로부터 세무사찰을 받았다. 청렴한 그였기에 드러난 탈세 사실이 없었다. 오히려 성실한 세무 납부가 드러나 표창장까지 받게 된다.

     

    시대의 양심

    유일한 박사는 대표 자리를 떠날 때는 자신의 자식에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손녀의 등록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기부했다. 1971년 당시 금액으로 362,000만 원. 그가 평생 기부한 금액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 박사의 손녀 유일선 씨는 자신에게 남겨진 등록금 중 반만 쓰고 나머지 반은 사회에 환원했다. 20년 뒤, 딸 유재라 씨는 200억 원에 이르는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



    김기영(news@)

    추천
    twitter facebook me2day
    리더경제
    다음 글쓰기새로고침







    일반 로그인
    소셜 로그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